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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구라다] 멈춤, 궁극의 경지

조회수 2019. 5. 16.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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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

1991년을 기억해야한다. 그러니까 한국시리즈 때였다. 이글스가 디펜딩 챔프 타이거즈에 도전했다. 무등 구장 1, 2차전은 홈 팀의 완승이었다. 맹장 선동열과 김정수가 1, 2차전을 지배했다.

도전자는 2패로 몰렸다. 3차전은 배수진이다. 한밭 구장의 에이스 송진우가 투입됐다. 좌완 계보의 시초가 호랑이를 꽁꽁 묶었다. 8회 2사까지 완벽했다. 단 1명의 출루도 용서치 않았다. 퍼펙트 게임이 어른거렸다. 남은 아웃은 4개 뿐이었다.

스코어 1-0. 코끼리 감독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보였다. 승리는 커녕, 일생일대의 망신을 당하게 생겼다.

저항이 시작됐다. 대타 정회열이었다. 가벼운 파울 타구가 나왔다.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플라이를 떨어트렸다. 묘한 조짐의 시작이었다.

카운트 2-2에서 5구째, 칼날 같은 볼이었다. 몸쪽 낮은 존을 꿰뚫었다. 송진우와 포수 유승안은 삼진을 확신했다. 몸을 돌려 덕아웃으로 향했다. 하지만 구심은 침묵했다. 5구째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코스로 섬광이 지나갔다. 이번에도 심판의 콜은 들리지 않았다. 볼넷이었다. 투수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퍼펙트 게임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 때였다. 견고하던 성이 허물어지 시작했다. 홍현우의 안타가 터졌다. 이어 장채근의 타구는 좌중간을 돌파했다. 2타점짜리 적시 2루타였다. 1-2로 역전됐다. 퍼펙트→노히트노런→완봉이 차례로 사라졌다. 급기야 승리까지 날아갔다. 윤재호의 3루타로 잠깐 사이에 4실점, 게임이 끝나버렸다.

3차전 후 몇몇 대전 팬들이 심판 숙소로 몰려가는 일도 생겼다. 이글스는 그 시리즈에서 1게임도 잡지 못했다.

그 후로 KBO 리그에 생긴 매뉴얼

아마도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렇게 기억한다. KBO 리그에는 매뉴얼 같은 게 생겼다. 모든 팀들이 지키는 어떤 철칙이다.

대기록에 도전하는 투수가 있다.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다. 그런데 막판에 아깝게 된다. 타이트한 긴장은 한 순간에 풀려버린다. 그럼 벤치는 꼭 타임을 부른다. 그리고 감독, 코치가 마운드로 간다. 헛헛함과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해서다.

당시 한밭 구장 투수는 23명까지 퍼펙트했다. 하지만 24번째 타자에서 어그러졌다. 그리고는 모든 게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 만약, 지금의 매뉴얼대로 벤치가 잠시 흐름을 끊어줬다면…. 어쩌면 뭔가 달라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

그쪽 동네 왼쪽 계보의 후계자가 있다. 미국에서도 씩씩하게 DNA를 발현하는 중이다. 지난 일요일, 어머니 날이 무대였다. 사방이 핑크빛이다. 스타킹, 신발, 글러브, 언더셔츠, 하다못해 손목 밴드까지 온통 화사하다. 하지만 그는 평소랑 똑같다. 쑥스러움이 많아 보인다. 모자챙, 그리고 가슴 리본에만 색깔을 입혔다. 유니폼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들 뿐이다.

핑크가 부끄러운 투수는, 그러나 완벽한 공을 던졌다. 22번째 아웃까지 볼넷 1개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모두 1루 도전에 실패했다. 이제 겨우 5개 남았다. 노히터가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24번째 타자는 헤라르도 파라였다. 카운트 1-1에서 3구째에 일이 터졌다. 91마일짜리 높은 직구에 정확하게 반응했다. 타구의 방향이 좋았다. 좌중간을 통과했다. 담장 앞에서 튀어 관중석으로 넘어가는 인정 2루타였다.

“타자가 잘 친 거예요. (실투가 아니라) 그쪽으로 던지려고 했고, 잘 대응한 거죠.” 피해자는 쿨하게 받아들였다.

무산된 노히터, 기립 박수

구장에는 다채로운 반응들이 쏟아졌다. 중계 화면이 비춘 것은 관중석의 어머니였다. 잠시 아쉬움의 손뼉이 지나갔다. 당사자도 비슷했다. 허리를 숙인 채 시선은 타구를 쫓았다. 결과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옅은 미소가 흘렀다. '보살 팬들과 함께 하더니 보살이 다 됐구나.'

허무함이 몰려왔다. 팽팽한 기대감은 일순간에 힘이 빠졌다. 만약 KBO 리그였다면 당연히 타임이 걸릴 대목이다. 감독, 코치, 아니면 포수라도 마운드를 찾았을 것이다. 다독다독, 토닥토닥. 그런 숨쉴 틈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대륙엔 그런 거 없다. 독립 정신을 바탕으로 건국된 곳이다. 누구 하나 살펴줄 리 없다. ‘서툴게 왜이래. 메이저리거가….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뭐 그런 식이다. 투수 코치는 인터폰을 집어든다. 불펜을 체크하는 장면이었다. 냉정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아니었다. 뜻밖의 요소가 나타났다. 관중이었다. 차베스 레빈(Chaves Ravineㆍ다저 스타디움의 별칭)의 손님들이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기립 박수가 이어졌다. 제법 긴 시간 동안이었다. 무산된 도전을 향한 격려의 갈채였다.

급류를 진정시키는 전략 '멈춤'

주목해야 할 장면이다. 이날 게임의 승부처였다. 내내 끌려가던 상대는 드디어 꼬투리를 잡았다. 2루타 한 개로 더 큰 것을 얻어내려 할 것이다. 변수를 키워, 승부를 바꾸려 할 것이다. 이제 그걸 막아내는 게 관건이다.

이 때의 백미는 '멈춤'이었다. 기록 무산의 허탈함, 8회의 피로함, 1사 2루의 긴장감이 가득한 순간이었다. 그걸 무마하고, 진정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전략이었다. 흐름이 급류가 되지 않도록 달래야 하는 과정이다.

그걸 조절하는 게 중요한 능력이다. 그라운드와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힘이다. 당사자가 멘탈을 잡지 못하면 팀 전체가 흔들린다. 그러나 그날 마운드에는 태산같은 안정감이 여전했다. 넉넉함, 여유작작함이 가득했다. 4만 5,667명이 지지하는 기립 박수를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원정 팀은 섬뜩한 독수를 들고나왔다. 윌머 디포가 초구에 기습을 감행했다. 3루쪽 번트로 흔들어보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실패했다. 상대는 이미 안정을 찾았다. 게다가 보기와 다르게 완벽한 필딩(Fieldingㆍ수비) 능력을 갖춘 투수다. 날랜 캐치 동작이었다. 이어 부드러운 턴으로 완벽한 1루 송구가 이뤄졌다.

그리고 2사 3루. 마이클 테일러와 10구까지 실랑이가 벌어졌다. 가장 숨가쁜 줄다리기였다. 이날 투구수 115개째인 9번째 공은 92마일이 찍혔다. 그리고 116구째 체인지업이 좌익수 플라이로 마무리됐다.

커리어 최고의 결정, 4월 9일의 '멈춤'

치열한 곳이다. 강하고, 빨라야한다. 오직 쎈 것만 살아남는다. 조금이라도 늦추고, 머뭇거리면 생명을 보장하기 어렵다. 그런데 역설적이다. 때로는 멈춤이 중요하다. 거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간이 있다. 쉼표를 얼마나 잘 찍느냐. 그게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모두가 기억하는 날이다. 4월 9일, 세인트루이스였다. 그는 스스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2회도 채우지 못한 시점이었다. 감독과 트레이너, 동료들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뒤로 했다. 그리고는 미련없이 철수했다.

10일만에 돌아왔다. 이후는 아시다시피다. 언제 그랬냐 싶다. 오히려 가속도가 붙었다. 무섭게 질주하는 중이다. 사이영, 매덕스, 허샤이저 같은 이름들이 연관검색어다.

이쯤에서 4월 9일의 판단을 재평가해야 한다. 물론 당시에는 말이 많았다. 민감한 부위의 재발이었다. 다들 혀를 끌끌거렸다. 이런저런 수군거림이 댓글창을 가득 메웠다. 본인은 심각한 통증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참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럼 왜 굳이 이력에 흠집을 자초했냐는 반문도 나왔다.

그러나 돌이켜보자.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다. 대단한 판단이었다. 말이 필요없는 정도다. 지극히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로 인해 어떤 반응이 있을지, 얼마나 불이익을 받을 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럼에도 결행했다. 어찌보면 커리어 최고의 결정 중 하나일 지 모른다.

'멈춤'은 그렇다. 궁극의 경지에서만 실행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의 전략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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