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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구라다] 구종 천재와 NO 슬라이더

조회수 2019. 3. 21.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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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부상이 이어졌다. DL과는 절친이 됐다.

그렇게 우울하던 시절이다. 복귀를 준비하는 마음이 오죽했겠나. 걱정과 의욕이 엇갈릴 무렵이다.

번민하던 그에게 투수 코치(릭 허니컷)가 뭔가를 툭 던졌다. 댈러스 카이클의 동영상이었다. 그의 피칭 중에 커터만 모아놓은 장면들이었다.

속도는 빠르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다. 타자들이 번번이 말린다.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저거다.’ 불펜에서 시운전을 끝냈다. 몇 주 뒤 바로 실전에 투입시켰다. 결과는 별로였다. 제대로 가다가도, 한두번씩 각이 커졌다. 통제가 어려웠다. 위험 부담이 크다는 의미다.

뭐가 문제인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벽에 부딪혔을 때였다. 다시 허니컷이 나타났다. 팁을 하나 알려줬다. ‘(실밥) 쥐는 법을 이렇게 바꿔봐.’ 원 포인트 레슨은 정확했다. 훨씬 좋은 제구의 커터가 생산됐다.

2017년 시즌 후반기. 재기의 결정적인 기틀은 이 신무기 덕분에 마련됐다.

곧 경기가 시작이다. 외야에서는 캐치볼이 한창이다. 힘들 일은 없다. 공 주고 받는 놀이 쯤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갑자기 덩치 큰 99번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몇 번의 캐치볼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걸음은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그리고는 모니터 앞에 자리잡았다. 화면에 뜬 영상은 댈러스 카이클의 투구 모습이었다.

캐치볼 때 투심 패스트볼의 감각을 깨달은 것이다. 이전에는 잘 쓰지 않았다. 그냥 직구처럼 쭉 뻗어갈 뿐이었다. 그런데 각도를 조금 바꿔봤더니 제대로 휘어지는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또다시 카이클의 영상을 보면서 확인했다.

이듬해(2018년) 스프링캠프 때 그는 이 공을 집중연마했다. 그리고 시즌 초반에 꽤 재미를 봤다.

                                                               사진 제공 = 게티 이미지

왜 가장 많이 쓰는 슬라이더에서 막혔을까

99번의 우수성은 2가지로 요약된다. 정확성과 다양성이다. 원하는 곳에 던지는 능력이 뛰어나다.

게다가 새 구종을 습득하는 재능도 탁월하다. 웬만한 변화구는 척척 자기 것으로 만든다. 심지어 동영상 시청만으로 가능한 경우도 많다. 관찰과 가벼운 시험 운행이 끝이었다. 불펜에서 며칠 만지작거리다가 상용화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투심, 커터, 커브 같은 아이템이 차곡차곡 추가됐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 군데서 덜컥 걸린다. 뜻밖에도 슬라이더다.

세상 흔하고, 사방에 널린 공이다. 변화구 중에서 겨우 초급 레벨에 불과하다. 리틀 리그 투수들도 던지는 공이다. 그런데 메이저리거가, 그것도 200억이나 받는 고액 연봉자가 뜻대로 못한다니. 도무지 납득이 어려운 일이다.

올 봄에는 야심차게 준비했다. 쓰앵님도 모셨다. 절정 고수 윤석민이다. 한 때 그 공으로 천하를 평정했다. WBC 때 세계 최고 타자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트린 공이다.

오키나와 미니 캠프에서 비기를 전수받았다. 이른바 노심(no seamed) 슬라이더다. 실밥을 걸치기만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애리조나에서 몇 주 동안 갈고 닦았다. 하지만 여전히 미완성이다. 런칭에 실패했다.

일단 파트너의 반대에 부딪혔다. 포수(오스틴 반스)는 “커터가 괜찮은 데 굳이 슬라이더가 필요하냐”는 입장이다. 두번째 시범경기 후 흥미로운 멘트가 나왔다. “포수님이 던질 필요가 없다고 해서 안 썼어요.”

그 다음에 로열스전에는 몇 개 던져봤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2개 모두 바닥으로 패대기 된 탓이다. “계속 연습을 하겠지만 당분간 경기에 쓰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포수님’은 기자들 곁을 지나가면서 “노 슬라이더”라고 키득거렸다.

기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함수 문제

이 정도면 <그것이 알고 싶다>에 제보해야 한다. 구종 천재 아닌가. 어려운 공들도 척척이다. 동영상만으로도 자기 것을 만든다. 그런 달인이 왜 평범한(?) 슬라이더에 막혔을까. 그것도 개발자가 곁에서 직접 가르쳤는 데 말이다. 풀기 어려운 미스테리다.

하지만 <그알>도 바쁘다. 해야할 게 한 둘이 아니다. 일단 우리끼리 머리를 맞대보자. 누가 알겠나. 그럴듯한 답 근처로 갈 지도 모를 일이다.

이걸 위해 필요한 작업이 있다. <…구라다>는 관점의 전환을 주장한다. 어느 추리 소설에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기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함수 문제고, 함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하 문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중에서)

슬라이더 문제다. 그런데 어쩌면 직구(패스트볼)와 관련된 문제일 지 모른다. 그런 의문에서 출발해보자.

전제가 있었다. 99번은 정확성이 탁월하다. 한때 천상계를 거닐던 클레이튼 커쇼의 말이 있다. “침대에서 자다가 깨도 바로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 친구다.” 틀린 말이 아니다. 볼넷에 대한 결벽증까지 느껴진다. 짜도 너무 짜다.

그런데 이 부분에 함정을 의심해보자. ‘과연 모든 코스에 대해서 그럴까’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제구력이 좋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그럴 수는 없다. 이를테면 바깥쪽을 잘 던지는 투수가 있고, 몸쪽 공략을 즐기는 타입이 있다.

99번의 경우는 어떨까. 주력 방어선이 뚜렷하다. 오른쪽 타자의 먼쪽이다. 그곳에 던지는 패스트볼의 정확성이 핵심이다. 주무기인 체인지업은 여기서 변형된 메뉴다. 외곽 빠른 볼이 워낙 까다롭기 때문에 체인지업에도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이룬다.

최근에는 필살기가 하나 더 늘었다. 빠질듯 하다가 존 안으로 휘어지는 백도어성 커터다. 불리한 카운트에서도 스트라이크를 잡아내는 무기다. 해설자 오렐 허샤이저는 이 공을 보고 “월드 클래스”라고 격찬했다.

    허샤이저가 월드 클래스라고 극찬했던 바깥쪽 커터.             mlb.tv 화면

우타자 몸쪽 = 좌타자 바깥쪽에 대한 정확성

반면 (우타자) 안쪽에는 다르다. 그 정도는 아니다. 작년부터 몸쪽 구사가 늘기는 했지만, 전문 영역은 아니다. 큰 것을 맞을 위험성도 크다. 심판의 콜도 한국보다 짠 편이다. 무엇보다 99번의 투구 스타일 자체가 올드스쿨한 면이 있다. 바깥쪽 위주의 볼배합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때문에 가까운 쪽에는 상대적으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곳이 왼쪽 타자에게는 외곽이 된다. 주로 공략해야 할 포인트가 된다는 뜻이다.

투수는 같은손 타자에게 강하다. 그리고 반대손 타자에게 약하다. 그게 보통이다. 그런데 그는 반대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타자에게는 확실한 공략 포인트가 있다. 말했다시피 먼 쪽 빠른볼과 체인지업이다. 이걸 좌타자에게 적용시키려면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의 조합이 된다. 그가 이 공의 장착을 위해 탐구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헛스윙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 말이다.

혹시 그런 반론이 있을 지 모른다. ‘그럼 좌타자 몸쪽을 공략하면 되는 것 아니냐.’

하지만 다르다. 일단 안쪽은 부담스럽다. 장타의 위험이 도사린다. 심판의 콜도 다를 수 있다. 무엇보다 표적의 환경(우타자→좌타자)이 바뀌면 정확성에도 변화가 생긴다. 이를테면 윌리엄 텔 효과다. 그냥 사과와 사람 머리 위의 사과를 쏘는 차이같은 현상이다.

투구판 위치에 따른 변수

그가 슬라이더를 아예 못 던지는 건 아니다. 한때 커쇼표 빠른 슬라이더를 구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에 꼭 드는 게 아니었다. 오랜 시간 공들였지만 여전히 표준량 미달이다. 원인이 뭘까.

전제했다시피 그 방면 직구를 의심한다. 빠르기야 차이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정확성이다. 원하는 곳에 적절한 배달이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

이럴 때 한가지 체크해야 할 포인트가 있다. 투구판의 위치다. 61㎝ 폭의 어디를 밟고 던지느냐가 변수다. 그의 경우는 1루쪽 끝을 밟는다. 대부분 투수들도 그 쪽을 활용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우타자의) 바깥쪽에 ‘최단거리+최적의 각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문제다. 한쪽이 편하면, 반대쪽은 불편해진다. 외곽에 유리한 조건은 몸쪽에 불리해진다는 뜻이다. 그건 다른 해결책으로 극복해야 한다.

얼핏 투구판 위치를 바꿔가면서 던지면 되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 생긴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 투수들은 일정한 위치에 발을 고정시킨다. 자칫 밸런스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롯데 레일리 같은 예외도 있다. 그는 타자에 따라 투구판을 옮기기도 한다. 아주 특이한 예다.

그럼 99번 투수가 롤 모델로 삼은 댈러스 카이클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반대다. 3루쪽 끝을 밟고 던진다. 덕분에 좌타자의 외곽쪽에 유리한 각을 만들어낸다. 최근 3년간 좌타 상대 .229의 피안타율을 기록했다. 우타자에게는 .255였다.

어쩌면 슬라이더의 문제는 그 방향 직구의 문제일 지 모른다. 마치 기하 문제처럼 보인 것이 함수 문제였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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