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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훈기의 스페셜야구]에드가의 길었던 야구 여정의 해피엔딩

민훈기 입력 2019.01.24. 10:13 수정 2019.01.24.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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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에 프로에 뛰어들어 좌절을 딛고 일어서 시애틀 최고의 타자로 자리하며 결국 명예의 전당으로

‘에드가 누구?’

국내에서 MLB를 15년 이상 오래 본 올드팬이 아니라면 생소한 이름일 것은 당연합니다.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젊은 MLB 팬들에겐 ‘도대체 누구기에 명예의 전당(HOF)에 들어갔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시애틀 인근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그를 모를 리가 없지만, 미국에서조차 90년대 그의 시대를 제외하면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게다가 HOF 후보 10년만에 마지막 기회에서 영광을 안은, 숨겨진 강자 에드가 마르티네스 이야기입니다.

시애틀 매리너스 팬들이 가장 사랑했던 선수 에드가 마르티네스 <사진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

에드가 마르티네스(56)가 어떤 타자였는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2019년 MLB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75% 이상의 득표로 영광의 자리에 오른 선수는 4명입니다. 그 중에 마리아노 리베라, 로이 할러데이, 마이크 무시나 등 3명이 투수이고, 에드가가 유일한 타자입니다. 그런데 양키즈의 마무리투수였던 마리아노는 HOF 역사상 최초로 100% 득표를 하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바로 그 ‘만장일치 마리아노’가 에드가 마르티네즈가 어떤 타자였는지를 생생하게 증명해 줍니다.

은퇴 후 한 인터뷰에서 마리아노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현역 시절 두렵던 타자가 있었느냐고.

그는 “타자를 두려워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할 수 있다. 긴박한 순간에 절대 상대하고 싶지 않은 타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에드가 마르티네스였다. 그 이유는 내가 절대 그를 잡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웃음) 어떤 구종을 어떻게 던지든 상관이 없었다. 도대체 그를 아웃시킬 수 없었다.”

두 명예의 전당 멤버는 정규 시즌 통산 20번 대결을 펼쳤습니다. 결과는 2루타 3개와 2홈런 포함 10안타와 볼넷도 3개나 얻으며 타율 6할2푼5리였습니다. 표본이 작기는 하지만 OPS가 무려 1.888이라니. 마리아노의 통산 피안타율은 2할1푼1리였습니다.


또 다른 마르티네스의 증언도 있습니다.

명예의 전당 선배이자 에드가와는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자로 에드가를 꼽았습니다. 그는 “타석에서의 참을성과 선구안, 그리고 커팅 능력까지 최고였다. 대부분 타자라면 당연히 헛스윙 삼진이었을 공도 그는 커트를 해냈다.” (페드로는 25타수 3안타 1할2푼으로 에드가의 천적이기도 했지만, 볼넷을 7개나 내줄 정도로 늘 조심스런 상대를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투수들이던 HOF 동기 할러데이와 무시나 역시 에드가를 만나면 고전했습니다.

무시나가 66타수 21안타로 3할1푼8리로 막은 것은 그나마 선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2루타 5개, 3루타 2개, 3홈런을 맞으며 고전해 OPS가 무려 .942나 됐습니다. 할러데이의 에드가 상대 피안타율은 4할4푼4리(18타수 8안타)였고, 2루타 2개와 홈런 1개를 맞았습니다.


그러니까 에드가 마르티네스는 HOF 동기 3명의 투수를 상대로 100타수 39안타로 3할9푼의 타율을 기록한 것입니다. 2루타 10개와 3루타 2개, 6홈런 등 장타만 무려 18개를 뽑았습니다.


1963년 1월 뉴욕에서 태어난 에드가 마르티네스는 2살 때 부모가 이혼을 하면서 어머니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로 이사해 외조모 슬하에서 성장합니다.

어린 에드가의 야구 인생이 시작된 것은 8세 때였습니다. 1971년 월드시리즈에서 푸에르토리코의 영웅 로베르토 클레멘테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이끌고 우승하는 것을 TV로 시청하면서 에드가는 완전히 야구에 꽂혔습니다. 그는 “그 월드시리즈를 본 이후 매일 같이 뒤뜰에 나가서 야구 놀이를 했다.”고 회상합니다. 당시 늘 그와 함께 야구를 하고 놀았던 건 두 살 위의 사촌형 카멜로 마르티네스였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야구 영웅이자 타격 코치였던 카멜라도 후에 빅리거가 됐습니다.

11세 되던 해 부모가 재결합하면서 삼남매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니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막내 에드가만은 할아버지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절대 나오지 않는 바람에 결국 홀로 외조부 곁에 남게 됐는데, 그는 후에 “그분들에게 내가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떠날 수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좀 대단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은 야구와 함께 합니다.

꼭 야구라기보다는 야구놀이였습니다. 사촌형 카멜로와 함께 무엇이든 던지고 치면서 놀았습니다. 공이 있으면 다행이었지만 작은 돌멩이나 병뚜껑도 훌륭했습니다. 특히 나무 막대기를 들고 변화무쌍한 병뚜껑을 정확히 쳐내는 놀이는 이 아이들의 아이-핸드(eye-hand) 콘택트 능력을 한껏 키워줬습니다. (고 장효조 감독이 떠오릅니다.)


푸에르토리코 도라도 시의 고교를 졸업한 후 제약 공장에서 밤일을 하면서 아메리카 컬리지에 진학한 에드가는 지역 세미프로 팀에서 야구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중 시애틀 매리너스의 지역 스카우트인 마티 마르티네스(역시 혈연관계는 없습니다. 그만큼 흔한 성입니다.)가 도라도 시에서 트라이아웃 캠프를 열었습니다. 에드가의 타격 실력은 지역에서도 꽤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MLB 스카우트 사이에는 맞추는 능력은 탁월한데 장타력이나 주력은 취약하다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곧바로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에드가를 본 마티 마르티네스는 무릎을 쳤습니다. 당장 계약금 4000 달러(약 450만 원)를 제시했습니다. 주저하던 에드가를 다그친 것은 사촌형 카멜로였습니다. 빅리그를 향한 긴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1983년 만 20세의 뒤늦은 나이에 미국 서북부 워싱턴 주 벨링햄 매리너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고국이자 또 타국 생활이 쉽지 않았습니다.

영어도 능숙하지 못한데다, ‘그렇게 추운 날씨에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첫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2년 만에 더블A로 올라가 3할을 쳤을 정도로 야구 실력은 숨길 수 없었습니다. 1987년에는 AAA까지 도달했고 129경기에서 3할2푼7리에 10홈런, 2루타 31개, 그리고 82개의 볼넷을 골라 출루율이 4할3푼4리에 달했습니다.

시애틀 구단도 드디어 그의 능력을 눈여겨보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9월에 콜업된 에드가는 13경기를 뛰면서 무려 3할7푼2리로 빅리그 투수들을 두들겼습니다. 그러나 4000 달러짜리 계약 선수에게 빅리그는 멀기만 했습니다. 다음 해인 1988년 메이저 스프링 캠프에 초대를 받았지만 중도에 마이너로 떨어졌고, AAA 시즌 초반 3루 수비 중 불규칙 바운드된 공에 코뼈가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시즌 3할6푼3리의 타율로 퍼시픽코스트리그 타격왕에 오르며 무력시위를 이어나갔지만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989년 마침내 개막전 로스터에 에드가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같은 루키인 켄 그리피 주니어에게 쏠렸고, 그 다음은 역시 루키인 오마 비스켈이 받았습니다. 결국 시즌 초반 간간히 기용되며 부진했던 에드가는 또 마이너로 떨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에드가는 자신의 강점을 찾아냅니다.

결코 좌절하지 않으며 어려울수록 힘을 내고, 고난을 또 다른 도약을 발판으로 삼는 투지와 강한 의지력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력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감과 성실함도 그의 영혼에 내재돼 있었습니다. 마이너에 다시 갔을 때도 “좌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는데 슬퍼하고 실망할 새가 어디에 있나.”라는 것이 그의 반응이었습니다.

1989년 마이너 시즌이 끝난 후 에드가는 고향인 푸에르토리코의 윈터리그에 참가했습니다. 43경기를 뛰면서 4할2푼4리를 기록한 그는 카를로스 바예가와 함께 리그 공동 MVP를 수상했습니다. 자신감이 훌쩍 배가된 그런 겨울이었습니다.


1990년 만 27세에 자신의 첫 빅리그 풀타임 시즌을 뛴 에드가는 3할2리의 타율에 OPS .830의 준수한 성적을 거뒀습니다. 그런데 팀에서 더욱 주목한 것은 에드가의 경기 준비를 위한 철저한 루틴과 자기 관리였습니다. 기술적인 훈련은 물론이고 힘을 키우기 위한 웨이트 트레이닝과 몸관리의 컨디셔닝까지, 그는 트레이너들의 꿈의 선수였습니다. 계리 세필드 이상으로 방망이를 머리 위 투수쪽으로 기울이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모든 공을 정타로 쳐내기에 타격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그를 곁에서 본 관계자들은 에드가가 얼마나 노력하는 선수인지를 입을 모아 증언합니다.


겨울 동안 무릎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1991시즌 4월 한 달 4할1푼2리로 시작하자 당시 레퍼브레 감독은 67경기에 1번 타자를 비롯해 에드가를 전천후로 타순에 기용했습니다. 4번 타자에 기용됐을 때 그의 타율은 3할8리였습니다.

2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음에도 팀에서는 주니어에 묻혔고, 미전역에서는 변방의 눈에 띄지 않는 숨은 고수 정도에 불과했던 에드가는 1992년 마침내 터집니다. 3할4푼3리로 리그 전체 타격왕에 올랐고, AL 최다 46개의 2루타로 중거리 타자의 위용을 뽐냈습니다. 첫 올스타, 첫 실버슬러거로 마침내 빅리그도 그의 진가를 인정했습니다.

참 독특한 타격 자세지만 그는 통산 3할 타율, 4할 출루율, 5할 장타율을 기록한 18명 중 하나일 정도로 발군의 타자였습니다. <사진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

그 후 7번의 올스타와 5번의 실버슬러거, 그리고 두 번의 타격왕 등 에드가 마르티네스는 빅리그에서 ‘조용하지만 치명적인 해결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켄 그리피 주니어와 랜디 존슨, 알렉스 로드리게스라는 불세출의 스타들이 있었기에 빅리그 전체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졌지만, 시애틀 매리너스 팬들에게 끝없는 사랑을 받은 선수는 에드가였습니다. 18년 빅리그 생활 동안 결코 시애틀을 떠나지 않고 지킨 것도 에드가였습니다. 팬들의 사인 요청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고, 근육위축병 퇴치와 어린이 암 방지 등 수많은 지역 봉사활동과 기금 모금을 요즘도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는 것도 에드가입니다.

새로운 방망이들이 도착하면 클럽하우스 라커에서 작은 저울을 놓고 면밀히 방망이 무게를 재면서 손잡이에 무게를 적어놓고 경기를 준비했던 에드가 마르티네스.

그가 10수 끝에 겨우 HOF 일원이 된 것은 시애틀이라는 변방의 팀에서 활약했고, 또한 지명타자(DH)에 대한 편견 역시 한 몫을 했습니다. 그러나 2015년까지만 해도 HOF 득표율 27%에 불과하던 그가 뒤늦게 나마 그의 진가를 투표 인단도 인정을 하기 시작했고, 지난 지난 4년간 16%, 15%, 12%, 15%의 급상승 끝에 결국 그 영광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의 선수 생활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시리즈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1995시즌 2년여의 부상에서 돌아온 에드가는 3할5푼6리로 타격왕에 오르면서 팀을 가을 잔치로 이끌었습니다.

뉴욕 양키즈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그의 불꽃 방망이는 더욱 뜨거웠습니다. 첫 두 경기에서 연속 3안타씩, 그러나 팀은 2연패를 당해 탈락 위기였습니다. 3차전 에드가는 만루 홈런을 치며 팀에 승리를 안겼고, 4차전에서도 3점 홈런을 터뜨렸고 승부는 2승2패 원점이 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차전.

시애틀의 킹돔은 5만7411명의 유료 관중이 들어찰 정도로 뜨거웠습니다. 양키즈는 1차전 승리 투수 데이빗 콘을 마운드에 올렸고, 7회까지 매리너스는 2-4로 뒤졌습니다. 그러나 8,9회에 각각 1점씩을 만회해 경기는 연장으로 갔습니다. 매리너스는 9회에 랜디 존슨을 올리는 강수로 위기를 막았고, 양키즈도 사이영상의 잭 맥도웰을 9회부터 마운드에 올리는 초강수로 맞섰습니다.


11회초 랜디 존슨이 1점을 내줘 매리너스는 다시 탈락 위기.

그러나 11회말 조이 코라와 주니어가 연속 안타를 치면서 주자 1,3루의 기회에 에드가의 타석이 돌아왔습니다. 9회에 삼진을 당했던 맥도웰을 상대로 에드가는 볼카운트 0-1에서 좌측선상으로 흐르는 날카로운 타구를 날렸습니다. 코라는 쉽게 득점했지만, 1루에서 있던 주니어마저 폭풍 질주로 홈 플레이트를 밟으며 기적 같은 리버스 스윕이 완성됐습니다.

25년이 지난 오늘도 매리너스 팬들은 ‘바로 그 2루타 (The Double)’라는 고유 명사로 부를 정도로 그 한방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연고지를 옮길 것이라는 소문이 돌던 매리너스가 시애틀에 계속 머물게 만든 한 방으로 평가받습니다. 킹돔을 허물고 세이프코필드를 새로 지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 2루타였습니다. 그 시리즈 5경기에서 에드가는 5할7푼1리(21타수 12안타) 2홈런 10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시애틀 매리너스의 심장이던 그가 은퇴한 후 세이프코필드의 남쪽 길은 ‘에드가 마르티네스 드라이브’로 명명됐습니다.


아, 에드가는 빅리그에서 5000타석 이상을 기록한 타자 중에 통산 3할 타율, 4할 출루율, 5할 장타율을 기록한 18명 중에 한 명입니다. 슬래시라인 .312/.418/.515가 그의 통산 기록입니다.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루 게릭, 로저스 혼스비, 타이 콥, 지미 폭스, 스탠 뮤지얼, 행크 그린버그, 트리스 스피거, 프랭크 토머스, 멜 오트, 해리 힐맨, 치퍼 존스 등에 이어 이제 에드가도 명예의 전당 동문이 됐습니다. (슈레스 잭슨은 영구 제명됐고, 매니 라미레스, 래리 워커, 토드 헬턴은 아직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상 제공: MLB KOREA]

이 기사는 minkiza.com, ESPN.com, MLB.com, baseballreference.com, fangraphs baseball, Wikipedia, The Athletic, yahoo.com, baseballprospectus.com, Bleacher Report 등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