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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구라다] 글러브 속에 감춘 수정구슬

조회수 2019. 5. 24. 23:4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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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매덕스

톰 버두치라는 기자가 있다. 이쪽 업계에서는 꽤 알아주는 인물이다. 그가 20년 넘게 일한 곳이 있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라는 매거진이다. 여기에 글을 하나 올렸다. 2014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제목이 이랬다. ‘그렉 매덕스와 톰 글래빈이 함께 명예의 전당으로 갈 수 있을까.’

버두치의 예상대로였다. 아니,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 해 쿠퍼스타운은 둘 모두를 영접했다. 압도적인 지지율로 첫 턴에 헌액됐다. 다만 놀랄 일은 있었다. 매덕스가 만장일치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겨우(?) 97.2% 밖에 찬성하지 않았다. 무려 16표가 이탈했다.

버두치의 기사에는 흥미로운 사진이 연출됐다. 매덕스와 글래빈이 등을 맞댄 모습이었다. 터너 필드의 마운드가 배경이 됐다. 마치 데칼코마니 같았다. 좌우 대칭은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 캡처

글래빈은 주로 2인자였다. 305승의 업적에도 맨 앞에 선 적이 별로 없다. 매덕스 탓이다. 우리가 흔히 ‘마 교수’ 혹은 ‘마스터’로 부르던 사람이다.

글래빈은 간혹 ‘거울에 비친 매덕스’로 불린다. 위대한 마스터의 좌완 모드 쯤으로 인식되는 말이다.

둘은 분명한 공통점을 지녔다. 보잘 것 없는 구속이었다. 평균 90마일 넘기기가 힘겨웠다. 그러나 장점이 확실했다. 탁월한 정교함이었다. 그럼에도 이견은 있다. 둘을 한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없다는 주장들이다. 즉, 글래빈은 타자의 먼쪽을 파는 스타일이다. 거기서 유인구로 함정을 만드는 패턴을 즐긴다.

반면 마 교수는 다르다. 지극히 공격적이다. 스트라이크 존에 집착한다. 버리는 건 없다. 다양하고, 현란한 무브먼트로 타자를 몰아붙인다. 때문에 둘은 철저히 다른 패턴을 지녔다.

하지만 참 쓸데 없는 논쟁이다.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지. 그게 뭐가 그리 중한가. 잘 던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다시 그 얘기가 튀어나왔다. 마스터의 은퇴 10년이 넘은 시점이다. 2019년 5월에 그가 재림했다는 썰이다. 바로 그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말이다.

러셀 마틴이 시작한 매덕스의 재림 신화

시작은 모두 그 때문이다. 다저스의 포수 러셀 마틴 말이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아마 완봉승 무렵이었던 것 같다. ‘류현진 같은 유형의 투수를 경험한 적 있는가?’ 포수니까 당연히 받는 질문이다. 이럴 때는 그냥 적당히 둘러대면 됐다. 그런데 엄청난 답변을 내놨다. “응. 있어. 너도 알지? 매덕스라고.”

눈이 번쩍한다. 이럴 때 기자는 신난다. 그런 딱 떨어지는 테마를 던져주니 얼마나 좋겠나. 이튿날 곧바로 기사가 출고됐다. 일단 매체가 만만치 않다. ESPN이었다. 세계적인 미디어에서 다룬 내용은 놀랄만하다. ‘새로운 매덕스의 유형이 보인다. 건강한 류현진이 거의 그렇다.’

가장 먼저 근거로 내세운 게 삼진/볼넷 비율이다. 여러차례 언급됐듯이 압도적인 1위다. 누구도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해 있다. 그건 매덕스도 마찬가지다. 볼넷을 극단적으로 혐오했다. 2001년에는 72.1이닝을 연속 무볼넷으로 통과한 적도 있다. 그나마 중단된 것도 고의4구 탓이었다. 대충대충해서는 ‘매덕스 경기(100구 이내 완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균자책점도 바닥을 뚫었다. 급기야 1.52로 리그를 평정했다. 전성기의 교수님과 견줘도 꿇리지 않을 숫자다.

이쯤에서 살짝 꺼려지는 지점이 생긴다. 이제 겨우 5월 아닌가. “그런 전설적인 투수와 비교되는 자체만으로 영광이죠.” 본인 자신도 몸을 사린다. 과하면 체할 지 모른다.

아무리 ESPN이라고 쳐도 그렇다. 설레발이란 소리 듣기 딱이다. 포수 말 한마디에 너무 간 것 아니냐는 얘기다. 마틴이 봤으면 얼마나 봤다고. 기껏 해봐야 반 시즌 씩 두번(2006, 2008년)이다. 그것도 리즈 시절을 한참 지난 때다. 거의 현역 말년이었다. 그 정도 경험으로 정색하고 매덕스를 소환하냐는 말이다.

                                                            사진제공 = 게티이미지

강력한 스피커 ‘허 위원’의 등판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일은 점점 커졌다. 강력한 스피커의 등장 때문이다.

주인공은 허 위원이다. 물론, 떠올리시는 그 허 위원이 아니다. SportsNET LA라는 방송사, 즉 다저스 경기를 전담마크하는 곳의 오렐 ‘허’샤이저 해설위원이 등판했다.

그가 누군가. 다저스의 전설이다. 1988년 마지막 우승 때 에이스다. 무엇보다 매덕스와 동시대를 누비던 인물이다. 그런 허 위원이 이 문제를 주목했다.

“둘을 비교하는 기사를 봤다.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히 비슷한 부분이 있다. 볼넷을 내주지 않으려는 것과, 정확한 커맨드를 중요시하는 게 그렇다. 어쩌면 Ryu가 우리 시대의 그렉 매덕스일 지도 모른다.”

<…구라다>는 이 부분에서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더 대단한 멘트가 이어졌다. 허 위원의 번뜩임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거의 모든 타자들은 빠른 공을 치려고 애쓴다. 스프링캠프 때부터 그런 노력들이 대부분이다. 누구는 작은 공으로, 누구는 검게 칠한 공으로 대응법을 찾는다. 그러나 류현진처럼 속도가 변화무쌍한 공을 치는 훈련은 없다. 그런 건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타자들이 고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모두가 궁금했던 지점이다. 저런 만만한 공을 왜 못 치는 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었다.

이 대목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말이 있다. 마 교수가 했던 유명한 강의(?) 내용이다. 허 위원이 류덕스를 설명한 것과 놀라우리만치 일치하는 부분이다.

“숱한 타자들을 겪었죠. 그러다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시력도 경험했어요. 공의 회전을 읽어내는 건 기본이죠. 커브나 슬라이더를 던지면 금새 알아차려요. 아주 작은 릴리스 포인트 차이로 구종을 알아내는 녀석들도 있어요. 최고의 기술은 속도에 변화를 주는 거예요. 인간의 눈으로 그걸 구별해내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딱 한 명, 그 빌어먹을 토니 그윈을 빼고는 말이예요.” 물론 중간에 들어간 F자 단어는 장난이 섞였다.

(참고로 고인이 된 토니 그윈은 매덕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 상대 타율이 .415나 된다. 거기까지는 그러려니한다. 믿을 수 없는 항목이 있다. 삼진이다. 컨트롤의 마법사는 그윈을 단 한번도 KO시키지 못했다. 무려 107타석이나 만났는 데 탈삼진 기록은 제로였다.)

3천안타 웨이드 보그스의 갈파

마 교수는 전성기라고 해봐야 89~90마일이었다. 속도는 평균에 한참 떨어진다. 그런데도 피해갈 생각은 없다. 주무기가 뭐냐고 물었다. 기가 막힌 대답이 돌아온다. “주무기요? 초구 스트라이크죠.”

그 공격성에는 당대의 배리 본즈조차 몸서리쳤다. “투 스트라이크에서 3구째 바로 삼진 잡으러 들어온다. 그런 그가 파워 피처가 아니면 누굴 파워 피처로 부르겠나.”

2019년의 류덕스가 딱 그렇다. 공짜라면 치를 떤다. 유리한 카운트에 모든 걸 건다. 위축된 타자를 가둬놓고, 손쉽게 요리한다. 겨우 90~92마일짜리 공으로 말이다. 삼진과 볼넷에 관련된 수치는 이미 거울 밖의 매덕스를 초과했다.

허 위원은 현역 시절 교수님의 커맨드를 이렇게 묘사했다. “찻잔에도 볼을 넣을 투수다.” 송곳같은 피칭에 감탄을 연발했다. 2019년의 류덕스를 향해서도 비슷하다. “저 친구는 자다가 침대에서 일어나서 바로 스트라이크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게임을 디자인하고, 상대를 분석하는 능력이다. 연구하고, 공부한다. 최상의 대결 플랜을 짜고, 실행하는 능력을 가졌다.

3천 안타를 달성한 3루수가 있다. 후에 명예의 전당에도 들어갔다. 웨이드 보그스다. 그가 양키스였던 1996년 월드시리즈 얘기다. 상대는 애틀랜타였다. 2차전에서 4-0으로 완패했다. 매덕스에게 8회까지 철저히 당했다.

경기가 끝난 뒤 얼이 빠진 보그스는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저건 뭐죠? 그는 타자의 마음 속에 앉아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스윙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면 한 가운데 스트라이크를 던져요. 마치 글러브 속에 수정 구슬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

수정 구슬(crystal ball). 과거와 미래를 훤히 꿰뚫어 보는 신비를 지녔다. 어쩌면 2019년의 류덕스는 그런 마구(魔球)를 글러브 속에 감추고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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