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미안하지만, 이런 한·일전 승리는 갖기 싫다

조회수 2018. 9. 4. 18:1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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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슴이 뛴다. 불과 3년 전이었다. 그날 밤 도쿄돔의 그 경기를 잊을 수 없다.

8회까지 우리는 숨 한번 쉬지 못했다. 오타니 쇼헤이(7이닝)에게 철저히 유린당했다. 안타 겨우 1개, 삼진은 11개를 당했다.

9회 초. 오열사가 빗장을 풀었다. 손아섭, 정근우가 뒤를 이었다. 불씨를 폭발시킨 것은 이대호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그 해 일본시리즈 MVP였다.

4구째. 조선의 4번 타자가 칼을 뽑았다. 좌측에 떨어진 적시타에 2명이 홈을 밟았다. 승부는 삽시간에 뒤집어졌다. 4만 명에게 음소거를 클릭했다. 도쿄돔은 싸늘한 도서관이 돼버렸다.

1점을 지킨 9회 말도 백미였다. 한국은 일사분란한 방어막을 구축했다. 상식을 파괴한 조합이었다. 잠수함(정대현)에게 좌타자(츠츠고)를 맡겼다. 우타 거포(나카무라)의 마크맨은 좌투수(이현승)였다. 김인식 감독-선동열 코치의 콤비는 현란한 운용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완성시켰다.

27번째 아웃카운트가 선언됐다. 김인식 감독이 선수들을 축하하러 나왔다. 약간 불편한 걸음이었다. SBS 중계팀의 엔딩곡이 귀에 선하다. 마야의 <진달래꽃>이었다. ‘가시는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스코어 5-1, 내용상도 완승이었다

함덕주는 이미 땀범벅이다. 8회부터 분투 중이다. 9회가 특히 발군이었다. 작은 불씨 하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보였다. 첫 타자 오키베 삼진, 다음은 2루 땅볼(타무라)이었다. 그리고 마츠코토에게 던진 먼쪽 낮은 공에 구심이 힘차게 호응했다. 퇴근을 알리는 구령소리였다.

스코어 5-1. 내용상은 더 차이가 크다. 시종 지배한 쪽은 우리였다. 사실 별로 불안할 일도 없었다. 덕아웃에서는 모처럼 웃음 소리도 들렸다. 눈부신 캐치로 실점을 세이브한 박병호를 향한 하이파이브에서는 되찾은 활력도 느껴졌다.

무엇보다 전현직 히어로즈의 파워가 돋보였다. 김하성, 박병호, 황재균의 압도적인 스윙이 번쩍였다. 자카르타 GBK 구장은 이들을 가두기 너무 좁았다.

일본 이시이 아키오 감독의 생각도 그랬다. “과연 프로의 타자들이 파워가 있었다. 중요한 경기라 사타케를 기용했지만 역시 상대 힘이 강했다. 사타케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는데 9번에서 2번으로 넘어가는 상대 타순이 강했다. 특히 수비도 강했다. 역시 프로 선수들다웠다. 특히 2번타자에게 홈런을 맞으면서 흐름이 넘어갔다.”

선동열 감독은 요즘 부쩍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중요한 경기를 이겼지만 코멘트는 많지 않다. “점수차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매 경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가급적 간략하게 넘겼다.

사태의 본질은 KBO의 정책 실패다

작년 1월이었다. <…구라다>가 올린 글의 제목이 이랬다. ‘KBO는 김인식 감독의 등 뒤에 숨으려 하지마라.’

WBC 대표팀 소집일 무렵이었다. 당시 이슈는 오승환이었다. 대표팀에 합류시키는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리그의 징계가 예정돼 있는 선수를 뽑는 게 맞느냐’ 하는 논란이었다.

이를 두고 김 감독은 여론의 동의를 구했다. “고심이 많았다. 결국 (오승환을) 뽑아서 기용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많이 도와달라.” 그런 말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보도진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구라다>는 이의를 제기했다. 노감독이 굳이 새파란 기자들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했느냐? 물론 그런 감성적인 접근은 아니다. 다만 절차와 과정의 불합리함에 대한 얘기였다.

대표팀을 운영하고 구성하는 책임자는 감독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틀은 KBO의 정책 내에서 이뤄진다.

선수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이냐. 프로를 참가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거기에 따라 리그를 중단할 것이냐. 이런 문제는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이다. KBO 총회(구단주 모임)나 이사회(구단 사장 모임) 같은 최상위 기구에서 의결하는 사항이다. 총재와 사무총장이 직/간접적으로 의사 결정에 개입하기 마련이다.

누굴 뽑느냐도 마찬가지다. 대표팀 선발은 대개 감독에게 전권을 준다. 이번 선동열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쏟아지는 비난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라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KBO가 의견을 내야 한다. 여론의 반감이 크고, 그로인해 우려될 부분이라면 당연히 나서서 적극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감독에게 전권을 줬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런 논리는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

대표팀 감독이다. 결코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자리다. 그러나 그로 인해 문제의 본질이 가려지면 안된다.

오지환을 왜 뽑았냐. 그건 본질이 아니다. 프로 선수들로 엔트리를 꽉 채웠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한창 달아오른 리그도 중단시켜야 했다. 왜? 금메달 때문이다.

‘금메달을 따야 한다’, ‘성적을 내야 한다’. 그 문제에 몰입하자 우스꽝스러워졌다. 애들 손목 비트는 꼴이 된 것이다. 이제 이겨도 자랑스럽지 않다. 지면 망신이다. 그런 모양새가 됐다.

게다가 병역 문제라는 민감한 사안까지 개입됐다. 비난 여론이 들끓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대회에 어울리는 팀을 구성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 KBO 정책의 실패가 사태의 본질이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으려다 숨만 헐떡이고 있는 셈이다.

한ㆍ일전은 오늘의 한국 야구를 있게 한 동력이다

역사는 발전한다. 그 명제 속에 보면 그렇다. 어쨌든 한국 야구도 발전했다. 위대한 스타들이 탄생했고, 대단한 기록들도 수립됐다. 찬란한 명승부가 팬들의 기억 속에 엄연히 살아있다.

그 중요한 길목마다 한ㆍ일전의 추억이 또렷하다. 어찌보면 한국 야구의 명맥을 잇게 한 동력일 것이다. 세계 선수권, WBC, 올림픽…. 잊지 못할 장면들이 남겨졌다. 개구리 번트, 마쓰자카, 이승엽, 이와세, 이치로, 임창용, 그리고 진달래꽃까지. 우리의 가슴을 끓게 만들었다. 환호와 갈채, 눈물과 탄식이 있었다. 그게 한ㆍ일전이었다.

KBO는 틀렸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금메달이 아니다. 시상대 높은 자리도 아니다. 먼 훗날 돌아봐도 떳떳한 역사다. 부끄럽지 않은 기록지다.

애쓴 선수들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어제 같은 한ㆍ일전 승리는 갖고 싶지 않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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