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에이스의 헌신

조회수 2018. 10. 17. 09: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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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쯤 전이다. 지난 3일 경기였다.

라이온즈 파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홈 팀은 여전히 희망을 붙들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태워버리겠다는 의지가 불꽃 같았다. 원정 팀은 거기에 맞서야 했다. 끈질긴 추격자들을 따돌리느라 숨이 턱에 찼다.

그렇게 중요한 게임이었다. 그런데 마운드의 투수가 뭔가 달랐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틈틈이 허리를 비트는 동작이 반복됐다. 잠깐잠깐 얼굴도 찡그렸다.

2-2로 팽팽하던 3회 말. 홈 팀이 폭발했다. 2사 1, 3루였다. 타자(이원석)가 초구에 반응했다. 143㎞ 직구에 정확한 타이밍이 발사됐다. 타구는 순식간에 좌측 스탠드에 꽂혔다. 팬들의 함성이 온통 파크를 뒤덮었다. 5-2. 승부를 결정짓는 한 방이었다.

스탠드는 들썩거렸다. ‘이원석’을 연호하는 외침이 가득했다. 하지만 커다란 환호에 가려진 게 있었다. 통증을 참는 신음이었다. 투수였다. 그는 공을 던지는 순간부터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마운드에서 주저앉았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하루 앞둔 15일이었다. 미디어데이가 열렸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한 군데로 쏠렸다. 과연 5위 팀이 누굴 앞세우느냐였다.

김기태 감독의 입이 열렸다. “양현종”이라는 이름이 들렸다. 듣는 사람들은 눈이 둥그레졌다. 반응은 한결같다. 물음표였다. ‘괜찮아요?’

“걱정이 많았다. 트레이닝 파트와 상의했다. 게임이 된다는 보고를 받았다. 며칠 전에 불펜 피칭 50~60개를 했는데 괜찮다고 했다.” 그 외에도 몇가지 구구절절한 부연 설명이 보태졌다. 그러나 독해력 문제의 답은 너무 쉬웠다. 캐스팅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딱 한가지였다. “본인의 뛰겠다는 의지가 워낙 강했다.”

업계에서도 비관적인 예상이 많았다. 그렇게 무리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우세했다. 정민철 MBC 해설위원은 “어쩌면 오프너 방식을 택할 지도 모르겠다”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선발이 약한 메이저리그 팀들처럼 불펜 투수를 활용할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였다. 그만큼 에이스의 선발 투입은 쉽지 않은 결정으로 보였다.

여전히 통증에 찡그리는 모습…그는 괜찮지 않았다

당일에도 걱정스런 눈길들이었다. ‘스피드가 얼마나 나올까.’ ‘몇 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시작 전부터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감독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답변해야했다. “어제(15일) 저녁 식사 시간에 (양현종을) 봤는데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는 우리 팀의 에이스다. 구위와 경기 상황을 보면서 교체 시기를 정하겠다.”

1회가 시작됐다. 우려와 걱정을 잔뜩 안고 출발한 것치고는 괜찮았다. 1, 2회를 삼자범퇴로 끝냈다. 3회와 4회는 조금 흔들렸다. 주자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위기를 맞았지만, 김주찬의 호수비 덕에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얘기하면 그는 괜찮지 않았다. 직구 스피드도 평소보다 낮았다. 평균 144~145㎞를 유지해야 하는데, 140㎞ 초반에 머물렀다. 밸런스가 좋지 않은듯 제구도 흔들렸다. 계속된 불리한 카운트에 애를 먹었다.

중간중간 허리를 트는 동작도 있었다. 통증이 느껴지는듯 찡그리는 표정도 간간이 나왔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결국 한계가 찾아왔다. 5회였다. 2-0으로 앞서던 경기가 뒤집혔다. 타격 방해, 인필드 플라이 낙구, 폭투, 송구 실책, 빗맞은 안타. 메이저리그를 방불케 하는 퍼포먼스가 줄줄이 이어졌다. 동점을 허용하고 1사 1, 3루. 투구수는 80개가 됐다. 원정 팀 벤치가 타임을 걸었다. 불펜의 문이 열렸다.

무엇보다 마운드를 내려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통증과 실망, 낙담이 교차하는 상황이었다. 보통이라면 부아가 치밀었을 순간이었다. 그러나 에이스는 달랐다. 그라운드를 떠나는 시선은 유격수를 향했다. 고개를 떨군 채 어쩔 줄 모르는 까마득한 후배를 향해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승계 주자는 모두 홈을 밟았다. 실점은 4개로 늘었다. 모두 비자책이었다. 투수 잘못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승패를 책임져야 하는 에이스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에이스란 무엇인가

5년 전 일이다. 센다이에서는 일본시리즈가 한창이었다.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신생팀 라쿠텐 골든 이글스가 맞붙었다. 최종 7차전이었다. 홈 팀 라쿠텐이 3-0으로 앞선 채 9회를 맞았다. 아웃 카운트 3개만 잡으면 창단 첫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작고한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투수 교체를 통보했다.

멀리 외야에서 누군가 달려나왔다. 추적추적 빗속이었다. 팬들은 모두 일어나 그의 등장 음악을 합창했다. 지금은 뉴욕으로 이사간 다나카 마사히로다. 그는 바로 전날 6차전에서 160개를 던졌다. 그리고 7차전에 15개를 보탰다. 이틀 동안 175개는 미친 짓이었다. 한국과 미국 언론에서는 쓴소리를 쏟아냈다.

라쿠텐의 본거지는 도호쿠(東北) 지방이다. 당시는 대지진이 난 2년 뒤였다.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시리즈 중계도 컨테이너 박스, 임시 상가 건물에 모여서 본 이재민들이 많았다.

헹가래 후 장내 인터뷰 때 기자가 물었다. ‘감독님 생애 첫 우승인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호시노 감독은 단호한 표정이 됐다. “아니다. 내 우승 따위가 뭐라고…. 줄곧 이 분들 아픔을 달래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싸웠다. 도호쿠의 어린이들,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용기를 안겨준 선수들을 칭찬해주시라.”

마지막으로 다나카를 올린 이유를 물었다. 호시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녀석이 없었으면 이 자리도 없었다. 9회 마지막 순간은 그의 몫이 맞다. 우리의 에이스 아닌가.”

마쿤(다나카의 애칭) 자신은 등판 순간을 이렇게 술회했다. “굉장한 의기를 느꼈다. 이 장면을 준비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하며 마운드에 올랐다.”

관중석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졌다. 머리가 허연 호시노 센이치도 엉엉 소리내서 울었다.

                                                         사진 = 라쿠텐 골든 이글스 홈페이지

옆구리를 부여잡고도 이닝을 마감했다

그 날. 지난 3일 대구에서 처음 옆구리를 부여잡았을 때 말이다. 마운드에 주저 앉는 모습을 보고 트레이너가 달려나왔다. 투수 코치도 따라나왔다. 큰 일 났다 싶은 표정들이었다. 통증 부위도 옆구리 쪽이면 간단치 않아보인다. 무리시킬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교체가 이뤄졌어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당사자가 고집을 부렸다. 연습 투구가 이뤄졌다. 두어개 던져보더니 계속 가겠다고 했다.

경기는 재개됐다. 다음 타자(이지영)에게 초구는 겨우 112㎞가 나왔다. 중계방송하던 SBS Sports의 투수 출신 해설위원 최원호는 “아유, 안 될 것 같은데요”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후 3개를 더 던졌다. 모두 비슷한 구속이었다. 최원호 위원이 다시 멘트를 날렸다. “선수는 미안함도 있고, 조금 안좋더라도 하려는 의지가 있겠지요. 당연히 그렇지요. 그런데 지금 던지는 모습을 보고는 코칭스태프에서 빠른 판단을 해야 할 상황인 것 같아요.”

당시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평소 그의 됨됨이라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이닝 중간에 내려가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 바로 동료에 대한 배려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불펜 투수에 대한 마음씀이었으리라.

어제도 마찬가지다. 한국시리즈도 아니다. 겨우 와일드카드 결정전이다. 그거 한 경기 이긴다고 크게 바뀔 것도 없다. 오히려 앞으로 헤쳐나갈 일이 더 걱정이다. 이쯤에서 몸조리나 하는 게 내년을 위해서 나을 지도 모른다. ‘조금 힘들 것 같다’고 빼도 뭐랄 사람 없다. 그런데 굳이 나섰다. 자기가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여전히 아픈 옆구리를 멀쩡한 척 하면서 말이다.

그들의 시즌은 끝났다. 마치 어제(16일) 경기가 축소판 같다. 어처구니 없는 실책과 실수투성이였다. 서툰 허둥거림이 난무했다. 1년 내내 힘겨운 나날이었다. 5등도 버거웠다. 그나마도 막판까지 후달렸다.

간신히 턱걸이로 통과했다. 그리고 단 1경기만에 탈락했다. 디펜딩 챔피언의 위용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실망만 안겨준 레이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의 가슴 속에 기억돼야 할 한 가지는 뚜렷하다. 바로 에이스의 헌신(獻身)이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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