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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구라다] 짠물 1위 류현진에게 괜한 잔소리

백종인 입력 2018.09.21. 07:37 수정 2018.09.21.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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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 가까이 됐다.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요즘 같지 않은 때였다. 아마도 한국 야구가 가장 찬란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2009년 WBC 2라운드 한ㆍ일전이었다. 1루 주자가 도발을 시작했다. 슬금슬금 리드를 키우는 중이다. 그 때였다. 투수의 번개같은 견제 동작이 나왔다. 화들짝!!! 주자는 황급히 몸을 던졌다. 간신히 1루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웬걸. 공은 여전히 투수의 손에 있었다. 페이크 동작이었던 것이다.

“우리쪽 응원석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그래서 한 번 더 해봤죠. 똑같은 동작이 반복되더라구요.” 1루 주자는 천하의 이치로였다. 그에게 굴욕을 선물한 씬이었다. 아울러 봉중근 의사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시간은 어쩔 수 없나보다. 의사는 은퇴를 선언했다. 조만간 고별식이 열릴 것이라는 슬픈 소식이다.

그는 나중에 그렇게 얘기했다. 발군의 견제 능력은 애틀랜타 시절에 터특한 것이라고. 당시 그곳에는 두 명의 탁월한 스승이 있었다. 톰 글래빈과 마이크 햄튼이었다. 모두 주자 검거율로 손꼽히던 좌완 투수들이다.

                                    KBS-TV 중계화면

봉중근 의사가 존경했던 톰 글래빈

톰 글래빈의 하드웨어는 별 볼 일 없다. ML 투수치고는 평균치 이하다. 키는 겨우 6피트(182.8㎝), 몸무게도 200파운드(90㎏)에 불과하다. 여기서 벡터량(속도)을 기대한다는 건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빠른 공은 90마일을 넘기 어려웠다. 평균 구속? 기껏 80마일 중반대였다.

그렇다고 다채로운 것도 아니다. 거의 투 피치에 가까웠다. 패스트볼+체인지업의 패턴이었다. 도대체 300승, 사이영상 2회 수상은 어떻게 이뤘을까. 의아함이 당연하다. 하지만 답은 간단하다. 스피드 빼고는 모든 걸 갖췄기 때문이다.

봉중근 의사가 감탄한 견제 능력은 기본이다. 탁월한 필딩(수비), 만만치 않은 타격까지(실버 슬러거 4회) 갖췄다. 풀타임이 된 1988년(22세)부터 42세 시즌인 2007년까지. 20년간 매해 25번 이상 선발 등판을 책임졌다. DL이 무슨 단어의 이니셜인 지도 모른다.

2014년 명예의 전당 헌액식 때. 왼쪽이 글래빈, 오른쪽은 그렉 매덕스.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게 있다. 완벽한 제구력이다. 흔히 말하는 핀 포인트를 저격술을 가졌다.

말했다시피 그는 철저한 외곽주의자다. 고집스럽게 바깥쪽만으로 상대한다. 그걸로 정글에서 살아남은 데는 비결이 있을 것이다.

스카우팅 리포트는 한 줄로 요약했다. ‘generous home plate umpire.’ 관대한 구심들만 만났다는 뜻이다. 유독 그에게만 인심이 후했냐? 물론 그럴 리 없다. 거칠게 얘기하면 심판들을 가지고 놀았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이런 말이다. 플레이볼이 선언됐다. 그가 던지는 공은 계속 먼쪽을 들락거린다. 잡아주면, 조금 더 빠져나간다. 안 잡아주면? 몇 인치 안으로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간을 본다. 구심의 성향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경계 부근에 집중적으로 몰아넣는다.

이쯤되면 심판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3~4회가 되면 자기도 모르게 존이 조금씩 넓어진다. 관대해진다는 건 그런 뜻이다. 덕분에 타자의 신경질은 덤으로 구경할 수 있다.

놀랍다, 후반기 볼넷 허용 리그 1위

괴물이 크게 한 건했다. 엄청난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3연전 싹쓸이의 시작이었다. 천적을 기죽인 승부도 만족스러웠다. 몸 풀 때 겨우 몇 번 던져본 게 전부란다. 그 신형 커터로 이 정도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쯤이면 목에 힘 좀 줘도 뭐랄 사람 없다. 덕아웃에서 다리 쩍 벌리고 앉아도 예뻐 보일 뿐이다.

모두가 제구력 덕분이다. 내외곽을 현란하게 넘나들었다. 몰리는 공은 거의 없었다. 대신 보더 라인에 걸치는 공들이 수두룩했다. 자신도 호투 비결을 로케이션으로 꼽았다.

로키스전 승리 후 인터뷰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안 데스몬드에 3볼로 몰린 데 대한 질문이었다. 대답은 명료했다. “홈런 맞을 생각으로 던졌다. 주자는 내보내지 말자고 던졌다. 맞더라도 가운데 던지려고 했다.” 그가 늘 하는 말이다. “볼넷 주는 건 질색이다.”

깔끔함은 기록으로 나타났다. 놀라운 결과다. 후반기 7번 등판에서 허용한 볼넷이 3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1개는 고의4구였다. 9이닝당(BB/9)으로 환산해보자. 40⅔이닝이었으니, 0.66개에 불과하다. 2게임을 완투해도 볼넷 1개 정도밖에 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짜도 너무 짜다. 소금이 뚝뚝 떨어진다.

이 정도면 리그에서도 톱 클래스다. 40이닝 이상 던진 116명 중 단연 1위다. 2위는 마이크 리크(0.72), 3위는 태너 로아크(0.96)였다.

세이버메트릭스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글래빈의 숫자들

물론 무조건 좋은 신호다. 볼넷에 짜다는 건 A급 투수의 기본 아닌가. 반대를 상상해 보시라. 얼마나 짜증나고, 갑갑한가. 맞더라도 시원하게 승부를 봐야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특히나 투구수 조절이 필요한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런데…그런데 말이다. 이 부분에서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기준을 벗어나야 하는 일이다. 즉 기록의 적용 조건을 바꿔보자는 뜻이다. 리그 톱의 수준에 맞춰서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앞서 톰 글래빈의 사례를 장황하게 떠들었다. 이유가 있다. 99번과 몇 가지 부합하는 점 때문이다. ① 왼쪽이다. ② 볼 스피드에 연연하지 않는다. ③ 바깥쪽 체인지업이 중요한 메뉴다. ④ 그래서 제구력에 목숨을 건다.

300승 투수는 특징이 있다. 대부분 통계 숫자가 소름끼칠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딱히 특급 투수에 걸맞는 게 없다. 때문에 요즘 세이브메트리션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대표적인 게 볼넷이다. 그의 통산 BB/9(9이닝당 볼넷 허용)는 3.06이다. 그렉 매덕스(1.80), 로이 할러데이(1.93), 커트 실링(1.96) 등 100명 가까운(정확하게는 94명) 투수들이 2.00 이하인 것과 대비된다. 즉 이 항목에서는 통산 23번째 300승의 레전드급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특히나 1회만 따지면 더 심하다. 1회 통산 ERA가 4.58(전체 3.54)이나 된다. 삼진/볼넷 비율은 1.16 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 1.74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사진제공 = 게티이미지

봉중근이 존경한 글래빈, 그에게 느껴야 할 것

2014년 올스타전이 광주에서 열렸다. 앞선 팬 사인회 때였다. 봉중근 의사 주변에 인파가 모였다. 기자들이었다. 화상 통화하고 있는 장면이 심상치 않아서다. 의사가 툴툴거린다. “야, 그만 좀 끊고 자라. 너 때문에 내 주변에는 팬들이 하나도 없어. 기자님들 뿐이야.” 핀잔의 상대는 다저스 투수였다. 세인트루이스 원정길에 심심해서 걸려온 전화였다. “내 탓은 무슨. 형이 인기가 없어서 그런 거예요.”

둘은 이상하게 친하다. 학교나 팀이 겹치는 게 없는 데도 그렇다. 아마도 대표팀에서 생긴 친분일 것이다. 특히나 후배가 유난히 따르는 눈치다.

이제 은퇴하는 선배가 존경했던 투수 얘기로 돌아가보자. 톰 글래빈은 왜 헤프게 던졌을까. 볼넷도 많고, 1회를 힘겹게 보냈을까. 정교한 핀 포인트 제구를 생명처럼 여겼던 대투수가 말이다.

기록의 이면에 집중해야한다. 99번 투수는 후반기 7게임에서 40.2이닝 동안 단 3개의 볼넷만 줬다. 분명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건 단면일 뿐이다. 그 뒷면도 봐야한다.

그 기간에 그는 2승 3패를 기록했다. 5실점이 1번, 3실점이 2번이나 있었다. 홈런은 5개를 허용했다. 공짜로 내보내지만 않았을 뿐이다. 많은 안타와 점수를 허용했다. 그건 팀의 승패와 직결된 것들이었다.

몬스터의 통산 BB/9는 2.28이다. 글래빈은 그보다 훨씬 높다. 무려 3.06이다. 심지어 22승(6패) 시즌(1993년)에는 더 올라갔다. 3.20까지 됐다. 사상 최고의 정밀함을 갖춘 스나이퍼가 왜 그랬을까.

본질에 치중하자. 목표는 이기는 것이다. 깔끔한 건 스타일일 뿐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때로 망가질 필요도 있다. 볼넷이라는 스트레스도 견뎌야 한다. 피하고, 돌아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무작정 '공짜는 절대 안돼'라는 태도만이 능사는 아니다.

어쩌면 그게 리그의 A급 또는 특급 레벨이 요구하는 조건인 지도 모른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