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내 등번호를 허(許) 하노라

조회수 2020. 1. 27.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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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 = OSEN

'23'은 NBA를 상징하는 숫자다. 마이클 조던 덕이다. 그 이후 에이스의 번호가 됐다. 영구결번이 된 6곳을 제외하고, 현재도 17개 팀에서 소비된다. 나머지도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감히' 하는 정서에 머뭇거릴 뿐이다.

작년이었다. 레이커스가 우승 멤버 수집에 나섰다. 르브론 제임스를 받혀줄 빅맨이 필요했다. 펠리컨스의 앤서니 데이비스가 타겟이었다. 괜찮은 조건이 오갔다. 흥정은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걸림돌이 생겼다. 백넘버였다. 킹 제임스와 갈매기 눈썹(앤서니 데이비스)이 모두 23번이었다. 한 팀이 되면 누군가는 포기해야했다.

양보한 쪽은 역시 대스타였다. 르브론이 순순히 물러섰다. 우승을 위해서라면 그깟 번호쯤이야. 그런 마인드였다. "앤서니에게 23번을 주겠다. 난 마이애미 시절 6번을 달면 된다. 그 넘버로도 챔피언이 됐다. 전혀 문제없다."

결국 갈매기 눈썹의 이적은 성사됐다. 1-6의 빅딜이었다. 그런데 백넘버 문제가 복잡해졌다. 르브론의 6번이 거부됐다. NBA 사무국의 딴지 탓이다. 변경 마감일(매년 3월15일)을 넘겼다는 이유였다. 그런 규정? 유니폼 제조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나이키는 이미 '23번 르브론'의 유니폼을 대량 생산/공급한 상태였다.

별 수 없이 'AD3'가 탄생했다. 앤서니 데이비스는 데뷔 후 7년만에 처음 3번을 달고 뛴다.

                                                            사진제공 = 게티이미지

57번을 위한 파티와 챔피언 반지

어느 틈에 레드삭스의 에이스가 됐다. 좌완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E 로드) 말이다. 지난 시즌 19승 6패(ERA 3.81)로 폭발했다. 그가 본궤도에 오른 2년 전이다. 2018년 스프링캠프 때 에피소드다. 새파란 25살짜리가 코치들 숙소를 찾았다.

똑똑. 문을 두들긴 곳은 엉뚱하게도 작전 코치의 방이었다. 카를로스 페블스(당시 42세)였다. "저기요 코치님, 부탁이 좀 있는데요." 쭈뼛거리며 말문을 꺼냈다. "백넘버 좀 바꿔주시면 안돼요?"

사연인즉 이렇다. E 로드의 우상이 있었다. 요한 산타나다. 같은 베네수엘라 출신이고, 좌완 투수다. 감히 그림자도 밟기 어려운 존재다. 아무리 다른 팀이어도, 같은 번호는 엄두도 못냈다. 하지만 그 무렵은 아니다. 산타나가 몇 년째 팀이 없어 전전할 때다. 은퇴나 다름없는 개점 휴업상태였다.

E 로드는 먼저 우상에게 연락했다. 양해를 얻기 위해서다. "평소 너무너무 존경하는데, 내가 님의 번호를 달아도 괜찮을까요." 말릴 이유가 없다. 산타나는 흔쾌히 승락했다. "나야 뭐. 지금 던질 곳도 없는데. 얼마든지 좋을대로." 그리고 곧바로 작전 코치의 방을 찾아간 것이다.

(페블스) 코치는 잠자코 사연을 들었다. 거절은 어려웠다. 57번을 주고 52번을 받기로 했다. 백넘버 맞트레이드는 전격 성사됐다. 드디어 E 로드는 오랜 숙원을 이뤘다. 이제 훨훨 날아갈 일만 남았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 코치는 조건을 하나 걸었다. "저녁 한번 쏴. 선수, 스태프 원하는 사람 모두에게."

                                                   사진제공 = 게티이미지

며칠 뒤였다. 스프링캠프 마지막 날이다. 시범 경기를 마친 빨간 양말들이 한 곳에 모였다. 플로리다 탬파에 있는 어느 고급 레스토랑이다. 참석 인원이 무려 56명이었다. 사고 '무'. 팀 전체가 하나가 돼서 백넘버 전달식(?)을 가졌다. 개인 스케줄과 자유로움을 중시하는 메이저리그에서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오랜 타지 생활을 마치고, 집 생각이 간절할 때 아닌가.

"대단했어요. 그런 건 처음이었죠. 우리가 정말로 한 팀이라는 걸 깨달았죠." (무키 베츠)

"최고의 파티였어요. 이 사람들과 함께여서 너무 좋다는 마음이었죠. 분위기가 절정일 때 누군가 소리쳤어요. '가자, 월드시리즈로.' 서로 MVP를 외쳤죠." (데이빗 프라이스)

"이런 경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요. 엄청난 팀워크가 느껴졌어요." (알렉스 코라 감독)

결국 그 해 반지는 레드삭스의 차지였다. 사인 훔치기와 더불어 등번호 교환의 효과도 한 몫 한 셈이다.

그렉 매덕스에게도 양보는 없었다

양보하고, 감사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2006년 8월 8일이었다. 다저 스타디움이 꽉 찼다. 그렉 매덕스의 홈 데뷔전 날이었다. 트레이드 마감 시한에 데려온 328승 투수다. 구단은 신문(LA타임스)에 전면광고까지 냈다. '다저스 매거진'은 8월호 표지 모델로 내세웠다. 야구장 통로와 기자실까지 인산인해였다.

관중들은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겨우 80마일 초반 투심이었다. 그걸로 마법을 걸었다. 상대는 6회까지 1점 밖에 못냈다. 모두가 마법사의 현란함에 매료됐다. (이날 패전 투수는 선발 맞대결한 로키스의 김병현이었다.)

눈길을 끈 게 또 있었다. 유니폼이다. 다저 블루가 참신했다. 그런데 숫자가 낯설었다. 20년 동안 그의 번호는 '31'이었다. 리그 최고 투수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36번을 달았다. 모두가 의아했다. 전설이 왔는데 생소한 백넘버라니.

다저스는 침묵했다. 공식적 언급은 없었다. 짐작만 있을 뿐이다. 그 팀에는 31번의 주인이 있었다. 투수 브래드 페니였다. 보통이라면 양보가 당연했다. 여론도 부글거렸다. 그러나 꿈쩍도 않는다. 알고보면 자신도 피해자(?)라는 논리였다. 말린스에서 왔을 때 자기 번호를 잃어버렸다. 28번을 달았던 제이슨 워스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마 교수는 쿨했다.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오히려 살뜰히 챙겼다. 페니는 마운드에서 덕아웃을 힐끔거렸다. 그럼 마교수가 다음 공의 힌트를 줬다. 1-1 실전 레슨을 해준 셈이다. (매덕스는 파드레스 시절도 30번을 달았다. 거기서는 31번이 영구결번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 게티이미지

정근우와 안치홍의 경우

챔피언스 파크가 있는 경기도 이천이다. 1월 초에 행사가 있었다. 닷새 동안 열린 이벤트는 '신인선수 오리엔테이션'이다. 트윈스의 루키들이 대상이다. 이를테면 신입사원 연수 같은 거다. 푸릇한 20세 전후들이 대부분이다.

와중에 특이한 외모가 있다. 연식이 좀 돼 보인다. 외부 강사나, 현지 직원으로 오해받기 딱 좋았다. 데뷔 16년차, 38세의 정근우였다. 구단측은 "그 정도 연차면 본인의 요청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그런데 당연히 참석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밝혔다. 호주 캠프도 선발대에 자원했다. "2루수용 글러브 하나만 챙겼다"는 각오도 남달랐다.

그의 합류에 트윈스는 시너지를 기대한다. 고려대 3년 후배도 마찬가지다. 김용의는 자신의 번호를 선뜻 내놨다. "근우형이 프로 데뷔 후 줄곧 8번만 달았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다. 당연히 양보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5번을 달게 될 것이다." 선배는 명품 지갑을 선물했다. 물론 빈지갑은 도리가 아니다. 신사임당 몇 분을 모셔서 보답했다는 후문이다.

          입단 동기들과 단체샷. 겸손하게 뒷줄 맨 끝에 자리했다.             사진 = LG 트윈스

부산으로 간 2루수도 마찬가지다. 안치홍(30)의 백넘버도 사연이 있다. 타이거즈 시절 8번은 한참 선배가 달고 있다. FA 재계약한 전준우(34)의 번호다. 차선은 13번이다. 경찰청 시절에 쓰던 것이다. 김대륙(28)이 주인이지만 구단에서 교통 정리해줬다. 물론 안치홍 본인도 직접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했다.

변화의 계절이다. 이해와 순서, 이견이 부딪히는 시간이다. 굴러온 돌, 박힌 돌이 딱 맞을 리 없다. 덜 뾰죽하게, 조화롭게 이겨내는 조직이 결국 강팀이 된다. 밖에서 볼 때는 사소하다. 그러나 본인들에게는 아닐 수 있다. 지켜내고, 양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게 팀워크의 벽돌 한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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