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야구

[민훈기의 스페셜야구]캐나다 출신 명예의 전당 래리 워커

민훈기 입력 2020.01.24. 12:34 수정 2020.01.24.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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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마지막 10번째 기회에서 기준 투표율을 채우며 MLB 명예의 전당에 입성

2020년 MLB 명예의 전당 투표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극과 극의 과정을 밟은 두 야수가 올해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됐습니다.

뉴욕 양키즈의 ‘캡틴 지터’는 후보 첫 번째 해에 만장일치에서 딱 한 표가 모자라 99.7%의 득표율로 대번에 명전 멤버가 됐습니다. 바로 작년에 그의 절친인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가 이뤘던 사상 최초의 만장일치 득표가 반복되리라는 예상은 깨졌지만 데릭 지터(46)의 명전 입당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역대 두 번째로 높은 득표율이었습니다.

캐나다 선수로는 두번째, 타자로는 처음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래리 워커의 기록과 야구 생애 @MLB.com


그리고 또 한 명의 영광의 선수는 바로 래리 워커(54)였습니다.

그는 후보가 된지 딱 10년 만에, 그러니까 후보자격 마지막 해에 76.6%의 득표로 입당하게 됐습니다. 75% 기준을 간신히 넘겼지만 최후의 기회에서 뽑히는 극적인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후보 자격이 15년에서 10년으로 줄어든 이후 아슬아슬한 선수들의 기회는 더욱 줄었습니다.

워커의 경우가 특히 극적인 것은 불과 4년 전 투표 때도 22%의 득표에 그치며 사실상 명전은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최소 자격 5%는 넘겼으니 후보로 남기는 했지만 75%는 요원해 보였습니다. 4년 만에 22% 이하에서 75%를 넘기며 명전에 들어간 선수는 1948년의 허브 펜콕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캐나다의 하키 소년

래리 케네스 로버트 워커 주니어는 1966년 12월 1일 캐나다 밴쿠버 인근의 메이플리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형이 셋 있었고, 아버지 래리 시니어와 함께 5명이 한 소프트볼 팀에서 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래리 주니어는 하키 소년이었습니다. 빙판이 아니면 길거리에서 친구들과 d늘 하키를 했습니다. 그중에는 나중에 프로하키리그 NHL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절친 캔 닐리도 있었습니다. 운동신경이 뛰어났던 래리는 발군의 골리였습니다. 그의 우상도 NHL의 유명 골키퍼 빌리 스미스였습니다. 래리의 형 캐리는 1997년에 NHL 몬트리올 캐나디언스에 골리로 드래프트될 정도로 하키 가족이기도 했습니다. 래리는 하키 외에 학교에서 배구 선수로도 뛰었지만, 야구는 그저 가끔 놀이로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16세에 지역 최고 주니어 하키 팀 입단 테스트를 권유받았다가 의외로 떨어지면서 그의 하키 인생이 꼬입니다. 야구 인생이 풀렸다고 해야 할까요?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다른 하키 팀에서 입단을 권했지만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고, 당시만 해도 하키에 비교할 수 없게 인기가 미미했던 야구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야구소년으로 변신

캐나다는 하키의 나라입니다. 야구는, 대부분 지역에서 일단 날씨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학생 야구리그라고 해도 당시에는 한 시즌에 10~15경기를 하는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물론, 아주 오래전 1887년에 MLB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던 강타자 팁 오닐이 캐나다 출신이었고, 1991년에는 투수 퍼거슨 젠킨스가 캐나다 선수로는 최초로 MLB 명예의 전당에 입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초까지도 캐나다의 야구는 MLB의 토론토와 몬트리올 두 팀이 그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습니다.


그 지형도를 바꿔놓은 것이 래리 워커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1984년 캐나다에서 세계청소년대회였습니다. 워커도 청소년대표로 뽑혀 출전지만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워커는 포크볼도, 슬라이더도, 커브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타자로서 탁월한 콘택트 능력과 눈에 띄는 파워, 그리고 빠른 발과 수비 능력까지 과시한 이 소년을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스카우트 부장 짐 패닝이 눈여겨봤습니다. 특히 모든 타자들이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했는데 유독 나무 방망이를 고집하던 이 소년의 홈런을 치는 장면을 보고는 1500 달러의 계약금을 제시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캐다다는 드래프트 지역이 아니라 16세만 넘으면 해외 아마추어 FA로 계약이 가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1500달러라니.......

그렇게 래리 워커는 프로야구 선수의 길을 걷게 됩니다.


18세 루키 시절 워커는 잠재력만 잔뜩 지닌, 형편없는 야구 선수였습니다. 야구를 몰랐습니다.


형편없던 야구 선수

18세에 하위 싱글A에서 시작한 워커는 형편없었습니다. 오로지 빠른 공은 잘 쳤지만 스트라이크존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특히 변화구 대처 능력은 제로였습니다. 모든 공을 패스트볼 타이밍으로 휘둘렀고, 홈플레이트 1미터 앞에 떨어지는 변화구도 헛스윙을 했습니다. 프로 첫 시즌 타율이 2할2푼3리에 홈런은 2개. 1,3루에서의 수비와 12도루 등은 나쁘지 않았지만 일단 타자로서의 기본기나 야구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가 미국 선수들에 비해 턱없이 떨어졌습니다. 10대 중반에 뒤늦게 야구를 시작했고, 야구 볼모지가 나름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몬트리올 구단에 올라온 코칭스태프의 보고서는 달랐습니다. 파워는 정상급이고 타자에게 가장 중요한 ‘눈과 손의 협응(eye-hand coordination)’은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발군의 스피드와 강하고 정확한 어깨는 이미 인정을 받았고, 특히 투지 넘치는 정신력과 배우려는 의지까지 보고서에 추가됐습니다. 짧은 첫 프로 시즌이 끝나자 구단은 곧바로 그를 인스트럭션리그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프로 2년차인 1986년 만 19세인 워커는 싱글A 두 팀에서 133경기를 뛰며 2할8푼8리, 33홈런, 90타점, 18도루, 2루타 19개, 3루타 11개를 기록했습니다. ‘5툴 플레이어 래리 워커’가 프로 생활 2년 만에 탄생한 것입니다. 아직 10대의 나이에.


워커의 위상과 기록

1989년 만 22세에 잠깐 빅리그 맛을 본 워커(20경기)는 1990년부터 풀타임으로 모트리올 엑스포스의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포지션은 외야로 돌려 주로 우익수를 봤고, 그해 신인왕 투표에서 7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994년까지 몬트리올에서 6년을 뛰면서 통산 2할8푼1리에 99홈런, 384타점으로 타선을 이끌었습니다. 2루타 147개, 3루타 16개, 98도루도 기록했습니다. 캐나다 청소년들은 캐나다 출신의 젊은 야구 스타에 열광했습니다. 곳곳에 리틀리그나 청소년 야구를 위해 래리워커 야구장이 지어졌고, 워커의 티셔츠를 입고 야구 토너먼트에 아이들이 줄지어 출전했습니다. 캐나다 팀 몬트리올에서 뛰면서 TV 등 노출도 훨씬 잦았습니다.


그러나 극도의 재정난에 시달리던 엑스포스는 FA가 된 27세의 젊은 간판타자에게 조정신청조차 하지 않았고, 워커는 콜로라도 로키스와 4년 2250만 달러 계약으로 캐나다를 떠나게 됩니다. 현 시가로 따지면 4천만 달러 정도의 액수로 평가되는데, 그의 전성기가 함께 열립니다. 로키스 첫 시즌인 1995년 3할6리에 36홈런과 101타점으로 화려한 시작을 알렸고, 1997년에는 3할6푼6리에 49홈런, 130타점을 기록하며 NL MVP에 뽑혔습니다. 그해 홈런왕은 물론이고 출루율, 장타율, OPS, 총루타수 모두 리그 1위였습니다.


워커는 총 5번 올스타에 뽑혔고, 골드글러브를 7번 받았으며 실버슬러거도 3차례 차지했습니다. NL 타격왕에도 3번 올랐습니다. 1984년부터 캐나다 야구협회에서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팁오닐 상’을 9번이나 받았고, 1998년에는 캐다나 최고의 운동선수에게 주는 ‘루마시 트로피’도 야구 선수로는 최초로 받았습니다.(후에 조이 보토가 두 번째로 받았지만, 1934년부터 주어진 이 상은 주로 동계 스포츠 스타가 차지합니다.)

워커의 통산 장타율 5할6푼5리는 역대 12위입니다. 그리고 타자에게 꿈의 기록인 ‘3할-4할-5할의 슬래시라인(slash line)’을 기록한 통산 19명의 타자 중 하나입니다.(5천 타석 이상) 빅리그 17년 통산 워커는 3할1푼3리 타율에 4할 출루율, 5할6푼5리 장타율을 기록했습니다. 1960년 이후 통산 이 기록을 세운 타자는 딱 6명뿐이며, 사실 한 시즌에도 3-4-5를 이루는 타자는 많지 않습니다.


몬트리올 입단 후 워커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야구 선수로 떠올라 야구 인기에 크나큰 기여를 했습니다. WBC 캐나다 대표 단골이었고, 은퇴 후에는 국가대표 코치를 지냈습니다.


쿠어스필드와 저평가

해발 1600미터 고지의 쿠어스필드에서 뛴 타자들에게 대해서는 늘 색안경 시선이 따라붙습니다.

워커 역시 10년을 그곳에서 뛰었고, 그것도 정말 뛰어난 기록을 남기며 화려한 야구 생애를 장식했기 때문에 ‘과연 다른 구장에서 뛰었다면?’이라는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우익수(1945년 이후) 10명 중에 통산 WAR(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이 워커의 72.7보다 낮은 선수로는 안드레 도슨, 데이브 윈필드, 토니 그윈, 블라디미르 게레로 등이 있습니다. 하나 같이 전설들입니다. 사실 WAR을 계산할 때는 구장 요인도 감안을 함에도, ‘그래도 쿠어스필드인데!’ 라는 말들을 여전히 하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워커가 약간 저평가 받는 이유는 다른 명전 멤버들에 비해 뛴 경기수와 햇수 등이 좀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늘 허슬플레이’ 때문에 잔부상이 잦고 큰 부상도 있었고, 풀타임 16시즌 중에 3번은 100경기도 못 뛰었습니다. 위의 10명의 우익수 중에 워커의 8030타석은 가장 적습니다. 1위인 행크 애런은 1만3941타석을 기록했고, 타석수 9위인 게레로가 9059타석으로 워커와 유이하게 1만석이 안 되는 타자입니다. 그런데 가장 적은 타석으로 이런 기록을 세웠다면 오히려 그게 더 대단한 것일 수 있는데요.


마지막 기회에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래리 워커는 캐다나 선수로는 2번째, 타자로는 처음으로 이 영광의 자리에 자신의 동판을 올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몬트리올이 아닌 콜로라도 모자를 쓰고 입당한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당대 관계자들의 코멘트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 토니 그윈 ‘래리는 NL에서 가장 완벽한 선수이자, 빅리그 최고의 베이스러너다.’


- 한 스카우트 ‘워커의 눈과 손의 협응은 비교 대상이 없으며, 외야수와 주자로서의 본능은 따를 자가 없다.’


- 덴버 포스트 토니 렝크 기자 ‘내가 취재해본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난 선수다. 1997년 NL MVP 시즌은 주루 플레이와 수비, 강력한 송구력 그리고 49홈런까지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숨 막히는 시즌이었다.’


- 더스티 베이커 전 로키스 감독 ‘그는 6툴 플레이어다. 내가 데리고 있던 선수 중에 단연 최고의 재능을 지닌 선수다.’


- 보비 콕스 전 감독 ‘최고 중의 하나라는 표현으로는 모자란다. 그가 바로 최고였다.’


P.S. 이번 투표에서도 역대 최다 홈런의 배리 본즈와 7차례 사이영상 로저 클레멘스는 75% 득표에 실패했습니다. 이제 두 번의 기회만이 그들에게 남았습니다. 워커는 실력으로도 명전 자격이 있을 뿐 아니라 평소 코믹하면서 열정적으로 야구에 헌신한 자세와 활달한 대인 관계 등도 마지막 득표 피치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됐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 기사는 minkiza.com, ESPN.com, MLB.com, baseballreference.com, CBC.ca, Wikipedia, cooperstowncred.com, The Athletic 기록 등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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