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38살의 앞 슬라이딩과 사라진 정근우의 득점

조회수 2020. 5. 25. 07: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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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이지? 첫 타석부터 일이 풀린다.

1-0으로 앞서던 1회 말이다. 1사 만루에 차례가 왔다. 카운트 1-0에서 2구째는 149㎞짜리다. 윌리엄 쿠에바스의 속구가 약간 몰렸다. 이를 악문 스윙이 출발했다. 하지만 어설프게 맞았다. 타구는 3루수 정면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쩌면 좋은가. 병살에 딱 맞는 땅볼이다. 5-2-3 또는 5-4-3이 틀림없다. 그런데 웬걸. 하늘이, 아니 땅이 도왔다. 첫 바운드가 크게 튄다. 앞으로 당겼던 3루수(강민국)가 점프했지만 키를 넘긴다. 2타점짜리 적시타가 됐다. 1루를 밟으며 모처럼 싱긋 웃는다. 14일 끝내기 안타 이후 열흘만의 타점이다.

여기까지는 화이트 칼라 직군이다. 몸 쓰는 일은 3회부터다. 1사 후 볼넷을 골랐다. 1루로 가면서 기획안 하나가 떠오른다. '(투수) 쿠에바스의 폼이 크다. 버릇도 좀 안다. 망설일 게 뭐 있나. 재고 자시고 할 거 없다.' 초구부터 승부를 걸었다. 김용의가 헛스윙 하는 사이 2루에 안착한다. 몸을 날리는 앞 슬라이딩은 필수다.

호사는 다마다. 그 때부터 일이 꼬인다. 김용의의 안타가 너무 잘 맞았다. 게다가 우익수 정면이다. 홈까지는 무리였다. 3루에서 멈춤 사인이 켜졌다.

논란이 된 3회 태그업

여기부터 세상이 시끄럽다. 무수한 논란이 된 장면의 시작이다. 다음 유강남의 플라이 때다. 2루수 조금 뒤쪽이다. 도전하기는 너무 얕다. 그래도 그가 누군가. 달리기라면 국가 대표급 아닌가. 게다가 센스 하나는 여전히 1등이다.

"3루 코치는 가라는 사인이 없었어요. 그런데 (우익수) 로하스 포구 동작이 조금 불안정하더라구요.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어요. 2루 도루 해보니까 오늘 주력도 괜찮다고 느꼈어요." (정근우)

과감하게 스타트했다. 그리고 홈에서 몸을 날렸다. 붕~. 전신이 30cm는 뜬 것 같다. 홈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마침 우익수의 택배도 빗나갔다. 태그는 어림도 없다. 여유있는 세이프다. SBS Sports 중계팀의 찬사가 이어진다.

"말씀하신대로 정근우의 발이 1점이네요." (이종열)

"아직 살아있는 정근우의 발." (정우영)


기막힌 생환에 덕아웃도 난리다. '젤 빨라, 젤 빨라.' '야, 오랜만이네.' 흙투성이 고참을 반기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그라운드가 싸늘해진다. 투수가 3루에 패스, 3루심이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어필 플레이 아웃이다. 태그업이 너무 빨랐다는 판정이다.

그런데 리플레이를 돌려보니 그게 아니다. 너무도 확연한 오류다. 중계팀도 말을 잇지 못한다. 류중일 감독이 달려나왔다. 몇 마디 항의, 그리고 손으로 네모를 그렸지만 소용없다. 비디오 판독 대상이 아닌 탓이다.

태그업 장면 SBS Sports 중계화면


앞 슬라이딩이 이렇게 위험한 것이다

그게 벌써 15년 전이다. 2005년 이맘 때다. 정확히는 5월22일이다. 뉴욕에서 지하철 시리즈가 열렸다. 팽팽하던 7회 말, 셰이 스타디움이 발칵 뒤집혔다. 홈 팀의 2루타 때문이다. (당시 36세) 늦깎이 루키 구대성의 데뷔 첫 2루타였다. (상대 투수 랜디 존슨)

더 놀랄 일은 그 다음이다. 후속 번트 때 3루에 안착했다. 그리고 텅 빈 홈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부랴부랴 달려온 포수와 뱅뱅 타이밍이다. 심판은 몇 차례나 양 팔을 힘껏 벌렸다. 확고한 세이프 판정이었다. (느린 화면상으로는 태그가 먼저였다.) 조 토리 감독이 항의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관중석은 "KOO"를 외치는 함성으로 가득했다.

이 장면은 그 해 메츠가 선정한 '올해의 최고의 플레이'로 꼽혔다. 그러나 사실은 후유증이 컸다. 홈에서의 슬라이딩이 문제였다. 머리부터 들어오는 격렬한 동작 탓에 부상을 얻었다. 왼쪽 어깨 회전근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당시 입었던 점퍼 주머니에 공이 들어 있었다. 그것 때문에 가슴팍 타박상도 입었다.)

이후 부상자 명단으로 이동했다. 나중에 복귀하기는 했다. 하지만 상승세는 이미 한풀 꺾인 다음이었다. 결국 시즌 후 팀을 떠나야했다. 메이저리그 커리어도 그걸로 끝났다.

사진 출처 = mlb.com 캡처

현장 용어로는 '앞 슬라이딩'이다. 있어 보이는 말로는 '헤드 퍼스트(head first) 슬라이드'다. 대중화시킨 인물은 저돌적인 피트 로즈다. 다리부터 들어가는 것보다 효율적이다. 빠르고, 태그를 피하는 데 유리하다. 그러나 단점이 크다. 부상 위험 탓이다.

목, 허리, 무릎, 손가락…. 삐끗하면 몇 주짜리 병가는 기본이다. 자칫 하면 선수 생명이 걸린다.

다치지 않더라도 그렇다. 앞 슬라이딩 많이 하는 선수들은 시즌 내내 시퍼런 멍을 달고 산다. 가슴팍, 무릎 같은 곳이 성한 데가 없다. 때문에 요즘은 무용론도 강하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는 논리다. 평생 앞 슬라이딩 거의 안하고 은퇴하는 경우도 꽤 된다. 더구나 선수 말년에야 오죽하겠나.

기록만큼 중요한 건 '기억'

2년 전부터 자리를 잃었다. 2루는 한참 어린 후배의 구역이 됐다. 자신은 1루와 외야를 전전했다. 그러다 보니 출장수는 계속 줄어들었다. 마침내 팀의 보호 명단에서도 제외됐다. 그 덕에 난생 처음 서울 살이가 시작됐다. 내야 글러브를 다시 챙긴 게 불행 중 다행이다.

그렇다고 보장된 건 없다. 오늘은 게임을 나갈지, 아니면 벤치에서 시작할 지. 매일 같이 배팅 오더를 확인해야 한다. 어쩌다 큰 실책도 했다. 확실히 예전같지 않다. 38살에게 2루는 만만치 않은 곳이다. 후배들과 자리를 나누는 게 당연하다.

지난 14일이 반전의 계기였다. 9회 대타로 나가 끝내기 안타를 쳐냈다. 그리고 꾸준히 출전 기회가 생겼다. 그렇다고 소름끼칠 정도의 활약은 아니다. 15게임에 타율은 겨우 2할에 턱걸이했다(.200). 그나마 눈에 띄는 건 도루 숫자 3개다.

어제(24일)도 2개를 성공시켰다. 3회에 이어 6회도 2루를 훔쳤다. 최초 판정은 아웃, 재심 청구를 통해 세이프를 얻어냈다. 이 때도 공중 부양술이 동원됐다. 격렬한 앞 슬라이딩은 기본이다. 덕분에 팬들은 이날 경기에 흥미로운 개인 기록을 추가시켰다. '2안타, 2도루, 2오심'이라고.

6회 판정은 번복됐다. 다행히 도루 1개는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3회 (태그업) 득점은 끝내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록만큼 중요한 게 있다. 바로 기억이다.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몸을 던진다. 흙투성이가 되며 위험과 고통 속으로 뛰어든다. 그건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팬들과, 동료들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리플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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